윤성호는 차트를 먼저 봤다.
이름, 나이, 진단명, 예후. 순서가 중요했다. 차트를 충분히 숙지한 뒤 환자를 만나야 감정이 개입되지 않았다. 달빛 정원에서 일하는 내내 지켜온 원칙이었다.
오늘의 마지막 입원 환자는 임수아, 29세, 여성, 교모세포종 4기였다.
잔여 예후는 6개월에서 1년.
성호는 노크하고 문을 열었다.
방이 생각보다 밝았다. 제주도의 봄 햇살이 큰 창문을 통해 방 안 가득 쏟아지고 있었다. 침대에 앉아 창밖을 보고 있던 여자가 고개를 돌렸다.
"안녕하세요."
밝은 목소리였다.
성호는 그 목소리가 약간 의외였지만 표정에 내보이지 않았다.
"임수아 씨 맞으시죠. 저는 주치의 윤성호입니다."
"아, 선생님이 그 유명한 윤 선생님이세요? 간호사 선생님들이 여기 제일 무섭다고 했던."
성호는 잠시 멈췄다.
"무섭다고 했습니까."
"딱 선생님처럼 생겼다고도 했어요."
무표정이라는 뜻이겠지. 성호는 그냥 넘겼다. 청진기를 꺼내며 가까이 다가갔다.
"기본 검진 먼저 하겠습니다. 불편하신 곳이 있으면 말씀해 주세요."
"두통이 좀 있어요. 어제는 왼손이 잠깐 저렸고요."
성호는 메모했다. 증상 진행이 빠른 편이었다. 기록에서 예측했던 것과 일치했다.
"오늘 입원하시면서 힘드셨던 건 없었나요."
"아 있었어요. 짐이 너무 많아서요. 저 책을 엄청 가져왔거든요."
성호는 침대 옆 선반을 봤다. 문고판 소설들이 꽉 들어차 있었다. 선반이 모자랐는지 바닥에도 몇 권이 쌓여 있었다.
"읽을 거 다 읽을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수아가 책들을 바라보며 말했다. "그래도 있으면 마음이 든든해서요."
성호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의사로서 할 수 있는 말이 없었기 때문이 아니라, 해야 할 말이 뭔지 몰랐기 때문이었다. 그런 말에 뭐라고 답하면 좋은지, 그는 오래전부터 알지 못했다.
"언제부터 이런 곳에서 일하셨어요?"
"5년 됐습니다."
"힘들지 않으세요? 매일 이런 환자들만 보시는 게."
성호는 펜을 잠시 멈췄다.
"직업입니다."
수아가 그를 바라봤다. 잠시 무언가를 생각하는 눈빛이었다.
"맞아요. 직업이죠."
그런데 그 말이 어딘지 슬프게 들렸다. 성호는 그게 이상했다. 자신이 한 말이 슬프게 들릴 이유가 없었다.
"질문 있으면 언제든지 연락 주세요."
차트를 닫으며 말했다.
"선생님."
나가려다 돌아봤다.
수아가 웃고 있었다. 억지로 만들어낸 웃음이 아니었다. 그냥 자연스러운 웃음이었다.
"잘 부탁드려요."
성호는 고개를 짧게 끄덕이고 나왔다. 복도에서 박 간호사와 마주쳤다.
"301호 환자, 오늘 입원 잘 됐습니까."
"네. 생각보다 밝은 분이더라고요."
성호는 차트를 병동 카트에 꽂으며 말했다.
"과하게 친절하게 대하지 마세요. 정이 드는 거 경계해야 합니다."
박 간호사가 잠시 성호를 봤다.
"선생님은 항상 그 말씀을 하시더라고요."
"맞는 말이니까요."
성호는 다음 차트를 꺼냈다. 임수아의 목소리가 아직 귓가에 남아 있었다.
잘 부탁드려요. 그 말이 왜 오래 남는지 그는 이해할 수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