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민준은 도서관에서 잠들었다.
기말고사 2주 전이었고, 전공 서적 세 권이 머리맡에 쌓여 있었으며, 남은 아메리카노는 이미 식어 있었다. 자야겠다는 생각조차 하지 못하고 그냥 눈이 감겼다. 22년 살면서 가장 편안한 잠을 잘 준비가 되어 있었다.
그런데 눈을 뜨자 도서관이 아니었다.
첫 번째로 느낀 것은 냄새였다. 책 냄새 대신 꽃과 풀의 진한 향이 코를 찔렀다. 두 번째는 소리였다. 에어컨 소음 대신 바람 소리, 새 소리, 그리고 사람들이 웅성거리는 소리. 세 번째는 눈이었다.
거대한 흰 대리석 방이었다. 천장이 어마어마하게 높았다. 천장 중앙에서 빛이 쏟아지고 있었는데, 그 빛이 민준이 서 있는 원형 바닥의 문양 위로 정확히 내리꽂히고 있었다. 바닥에는 복잡한 기하학적 문양이 금빛으로 새겨져 있었다.
그리고 그 원 밖에, 적어도 50명은 되는 사람들이 민준을 바라보고 있었다.
갑옷을 입은 사람들, 긴 지팡이를 든 사람들, 화려한 예복을 입은 사람들. 다들 표정이 굳어 있었다.
"안녕하세요?"
자기 입에서 그 말이 나오는 순간 민준은 아, 이 상황에서 그게 최선이었나 싶었다.
앞쪽에 서 있던 은발의 여자가 한 발 앞으로 나왔다. 민준보다 나이가 많아 보이지 않았다. 하얀 예복을 걸쳤고 이마 위에 가느다란 금관을 쓰고 있었다.
"이계에서 오신 분이 맞으시죠?"
한국어였다. 민준은 순간 이상하다고 생각했다가 이내 포기했다. 한국어가 들린다면 받아들이는 거다.
"네. 맞는 것 같아요."
"저는 아스테리아 왕국의 제1공주 엘리나입니다. 소환에 응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민준은 입을 열었다가 닫았다. 이 상황에서 뭐라고 해야 하는지 몰랐다. 응한 게 아니라 자는 동안 끌려온 건데, 라고 말할까 했는데 그것도 좀 그랬다.
"소환은 언제 다시 돌아갈 수 있어요?"
엘리나의 표정이 잠깐 흔들렸다.
"그것이 조금 복잡한 문제입니다."
"복잡하다는 게 어느 정도로요."
"마왕이 6개월 후 부활합니다. 그것을 막으시면 돌아가실 수 있습니다."
민준은 잠시 그 말을 머릿속에서 굴려봤다.
"마왕."
"예."
"제가 막아야 해요?"
"예."
"저 대학생인데요."
"알고 있습니다."
"싸움도 못 하는데요."
"알고 있습니다. 그래도 당신이어야 합니다."
엘리나가 말했다. 확신에 찬 눈빛이었다. 주위의 기사들과 마법사들도 모두 민준을 보고 있었다.
민준은 한숨을 내쉬고 바닥의 금빛 문양을 내려다봤다.
뭔가 이상한 게 느껴졌다. 아까부터 이상한 게 느껴졌는데, 눈앞의 사람들 때문에 무시하고 있었다. 바닥의 문양에서 올라오는 빛이 민준의 손 위에도 흘러들고 있었다. 빛이 손 안으로 스며들어 무언가 정보처럼 흘러오는 것 같은 감각이었다.
손에 든 것도 없는데 세상이 보였다. 엘리나를 보자 그녀의 이름, 나이, 직위, 마력 수치 같은 것들이 희미하게 겹쳐 보였다. 뒤의 기사를 보자 그 기사가 쓸 수 있는 검술의 체계가 보였다.
민준은 눈을 깜빡였다. 그게 사라지지 않았다.
"혹시 제가 지금 뭔가 능력을 갖게 된 건가요?"
엘리나가 눈을 크게 떴다.
"발현됐군요. 소환과 동시에 능력이 발현됐어요."
"어떤 능력인지 아세요?"
"이론적으로는 알고 있습니다. 다만 실제로 나타난 것을 본 건 처음입니다." 엘리나가 잠시 숨을 고르고 말했다. "무한 도감술. 보이는 모든 것의 정보를 읽고, 그 기술을 모방할 수 있는 능력입니다."
민준은 천천히 뒤를 돌아 방 안을 훑었다. 모든 사람들의 정보가 겹쳐 보였다.
"알겠어요."
민준이 말했다.
"조건이 있어요. 6개월 안에 마왕을 막는 방법을 찾는 거 당신이 도와주세요."
엘리나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