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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벌가의 봄

1화: 비 오는 날의 충돌

2026년 3월 6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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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가 왔다.

예보에 없던 비였다. 오서연은 인테리어 샘플 박스를 양팔에 가득 안은 채 한성그룹 본사 건물 앞 계단에서 멈춰 섰다. 우산이 없었다. 당연히 없었다. 예보에 없었으니까.

"하."

짧게 한숨을 내쉬었다. 박스 안에는 내일 납품해야 하는 패브릭 샘플과 색상 차트가 들어 있었다. 젖으면 끝이었다. 재주문하면 일주일, 거래처에 설명하면 또 하루. 납기일은 내일 오전이었다.

오서연은 하늘을 한 번 보고 박스를 한 번 내려다봤다. 그리고 마음을 먹었다.

뛰는 거다.

마침 건물 입구에서 나오던 검은 정장의 남자와 정확히 정면으로 부딪혔다. 박스가 공중으로 날아올랐다. 파란색 패브릭이 빗속에 흩날렸다. 색상 차트가 계단을 타고 흘러내렸다. 오서연은 남자의 가슴팍에 얼굴을 박은 채 한 박자 멍해 있다가 뒤로 물러섰다.

"죄송합니다. 제가 앞을 못 보고—"

고개를 드는 순간 말이 끊겼다.

무표정이었다. 어떤 감정도 담기지 않은, 그야말로 텅 빈 눈빛. 30대 초반으로 보이는 남자가 자신의 셔츠에 묻은 뭔가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하얀 셔츠에 커피색 얼룩이 번져 있었다. 아까 오서연이 들고 있던 박스 틈새에 끼워두었던 커피 컵이었다.

"어머."

오서연은 냉큼 박스에서 손수건을 꺼냈다. 손수건으로 셔츠를 닦으려 손을 뻗자 남자가 미묘하게 한 발 물러섰다.

"됩니다."

짧은 말이었다. 차갑지는 않았지만 따뜻하지도 않았다. 그냥 사무적인 말투였다. 오서연은 손을 거두며 머쓱하게 웃었다.

"세탁비 드릴게요. 명함 있으세요?"

남자가 이번엔 오서연을 똑바로 봤다. 빗속에서 새파랗게 흩어진 패브릭들과, 계단 아래로 흘러내리는 색상 차트들을 바라보다가, 다시 그녀를 봤다.

"됩니다."

같은 말을 반복했다. 그러고는 진짜로 그냥 지나쳐 갔다. 검은 우산을 펴들고, 계단을 내려가고, 차에 올라탔다. 그 모든 과정이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흘러갔다.

오서연은 계단 위에서 그 모습을 멍하니 바라봤다.

그러다 퍼뜩 정신을 차렸다. 비였다. 샘플이었다. 당장 주워야 했다.

허겁지겁 계단을 내려가 패브릭을 모으는데 누군가 커다란 검은 우산을 오서연의 머리 위로 드리웠다. 올려다보니 아까 그 남자가 계단 위에 서 있었다. 우산대를 오서연 쪽으로 기울인 채 자신은 비를 맞으면서.

"다 줍고 나면 로비로 들어가세요."

말하고는 차로 돌아갔다. 정말로 그냥 갔다.

오서연은 젖은 우산을 손에 쥔 채 잠시 그 자리에 서 있었다. 비가 남자의 어깨를 적시는 것을 봤다. 차 문이 닫히는 것을 봤다. 차가 나가는 것을 봤다.

뭐야. 작게 중얼거리고 패브릭을 안아 로비로 들어갔다. 경비 아저씨가 대걸레로 바닥을 닦으면서 그녀를 봤다.

"아가씨, 누구한테 우산 받았어요?"

"저도 잘 모르겠어요."

로비 한편 소파에 앉아 샘플들을 점검하면서 오서연은 아까 그 남자의 얼굴을 생각했다. 분명 낯이 익었다. 어딘가에서 본 적 있는 얼굴. 뭔가 유명한 사람인 것도 같고.

핸드폰으로 방금 찍어둔 우산 사진을 열었다. 손잡이 쪽에 금박으로 작게 새겨진 글자가 보였다.

한성그룹.

아. 오서연은 아까 본 얼굴을 다시 떠올렸다. 경제 뉴스에서 보던 얼굴. 잡지 표지에서 보던 얼굴. 올해 서른두 살, 한성그룹 후계자.

한준혁.

그 이름을 소리 내어 말하고, 오서연은 손에 쥔 우산을 내려다봤다.

돌려줘야 했다. 그것도 몰랐던 얼굴이라면 몰라도, 이미 알아버렸는데 그냥 들고 있을 수는 없었다.

오서연은 가방을 뒤졌다. 한성그룹 담당자 명함이 있었다. 이번 납품 건 때문에 받아뒀던 것이었다.

이거 인연이라는 거잖아. 혼자 중얼거리고 전화기를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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